官舍 | 관사1
大廳.
대청.
史官房.
사관방.
本廳.
본청.
鍼醫廳.
침의청.
議藥同參廳.
의약동참청7.
掌務所.
장무소.
書員房.
서원방.
醫女房.
의녀방.
藥材東西庫 東庫提調監鎖.
약재동서고 동고제조가 자물쇠를 맡는다.
冊庫.
책고.
氷庫.
빙고.
硏末間.
연말간8.
搗末間 以上兩院同.
도말간9 이상은 두 원이 같다.
내의원의 관청 건물에 대해 설명한 조문이다. ↩︎
홍문관: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을 관리, 왕의 자문기구로서 옥당(玉堂)이라고도 부른다. ↩︎
동쪽에 있고:헌종(憲宗) 때 증보된 《궁궐지(宮闕志)》 권2에서는 ‘홍문관의 북쪽(弘文館北)’이라 하였다.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내의원 관청 건물들은 북쪽과 동쪽에 걸쳐있으므로 본문과 《궁궐지》의 설명은 둘 다 옳다. ↩︎
경희궁 숭정문:경희궁의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의 정문이다. ↩︎
《궁궐지》 권4에서는 ‘숭정문 바깥의 남쪽(崇政門外南)’이라 하였다. ↩︎
내의원은 국왕과 세자 등의 진료를 담당하였기에 궁궐 내에 있었다. 따라서 전란이나 화재 등의 이유로 기존 국왕의 거처가 새롭게 바뀌게 되면 내의원의 위치도 바뀌게 된다. 즉 《내의원식례》가 저술될 시기에 내의원의 위치가 이 두 곳이지 조선 전 시기를 거쳐 이 장소로 볼 수 없다. 반면 혜민서와 전의감은 궁궐 밖에 있었고, 훼파되기까지 동일한 장소에서 단순히 관아 건물의 증감만 있다. 원래 조선의 법궁(法宮)은 경복궁(景福宮)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까지 그 역할을 했다. 《궁궐지》 권1을 보면 경복궁의 내의원은 ‘관상감의 남쪽[在觀象監南]’이라 하였다. 관상감은 상의원(尙衣院) 남쪽에 있었고, 상의원은 영추문(迎秋門) 안에 있었다.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문(西門)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까지 내의원의 위치는 이 장소로 보아야한다. 《궁궐지》 권2를 보면 창경궁(昌慶宮)의 내의원은 ‘명정전 북쪽에 있다[在明政殿北]’라고 하였다. 해당 내용은 경희궁의 화재와 관련되어 내의원이 창덕궁과 창경궁에 설치되었던 시기로 이해하면 되겠다. 또한 내의원을 설명하면서 ‘입심억석의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入審憶昔揭板, 英祖御筆]’라고 되어 있어 현재의 억석루(憶昔樓)도 내의원의 부속 건물임이 확인된다. 《승정원일기》 영조 37년(1761) 6월 11일 기사에영조(英祖)가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가 입시한 가운데 ‘입심억석(入審憶昔)’의 네 글자를 친필로 썼다는 내용이 있다. 억석루(憶昔樓)는 홍문관의 동쪽에 있다. ↩︎
침의청과 의약동참청은 각각 내침의(內鍼醫)와 의약동참의(議藥同參醫)가 머무는 곳이다. 본청과 이 두 건물을 합쳐서 삼청(三廳)이라 한다. ↩︎
연말간:《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창덕궁(昌德宮)의 경우 홍문관(弘文館) 북쪽에 위치한 두 칸 크기의 건물로 돌로 된 약연(藥硯)이 칸 별로 놓여있다. ↩︎
도말간:《동궐도》를 보면 창덕궁의 경우 홍문관 동북쪽에 위치한 한 칸 크기의 건물이다. ↩︎
직방:조회 시간을 기다릴 때에 관아별로 기다리는 장소이다. ↩︎
창덕궁 돈화문:창덕궁의 정문이다. ↩︎
경희궁 개양문:경희궁의 남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