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田 | 약전1
藥田 舊時, 藥田九日半耕, 在於東小門外沙阿里. 乾隆乙酉, 洪啓禧提調時, 斥賣, 逐年生殖, 至庚寅, 李尙書福源提擧時, 分買於三處. ○一在東部建德坊紅門立洞, 空垈三百間, 及田半日耕, 每年收稅十七兩. ○一在高陽富原面西江舊水鐵里, 塲字田六負二束, 同字田八負四束, 每年收稅五兩. ○一在同面新水鐵里, 冬字田六負, 同字田半日耕, 食字田三負, 合三作二日耕, 每年收稅十兩. 以上收稅錢, 庫子收捧二十兩, 以補本署及諸上司無來貢進排藥材, 十二兩添補於入直柴油價. ○詳見《藥田案》.
약전 과거 약전은 9일 반 갈이로 동소문(東小門)2 바깥 사아리(沙阿里)3에 있었다.4 건륭 을유년(1765), 홍계희(洪啓禧)가 제조로 있을 때 헐값으로 팔고 해마다 이자를 불리다가 경인년(1770)에 이르러 상서(尙書) 이복원(李福源)5가 제조로 있을 때6 3곳에 나누어 샀다. ○하나는 동부 건덕방(建德坊)7 홍문입동(紅門立洞)8에 있었는데, 공터 300칸 및 밭 반일 갈이로 매년 거두는 세금이 17냥이었다. ○하나는 고양(高陽) 부원면(富原面)9 서강(西江) 구수철리(舊水鐵里)10에 있었는데 장자전(塲字田)11 6부12 2속, 동자전(同字田) 8부 4속으로 매년 거두는 세금이 5냥이었다. ○하나는 같은 면(面) 신수철리(新水鐵里)13에 있었는데, 동자전(冬字田) 6부, 동자전(同字田) 반일 갈이, 식자전(食字田) 3부, 셋을 합치면 이틀 갈이로 매년 거두는 세금이 10냥이었다. 이상 수세전(收稅錢)에서 고지기가 20냥을 수봉(收捧, 세금을 거둬들임)하여 본서 및 여러 상사(上司)의 무래공(無來貢)14 진배 약재를 보충하고 12냥은 입직 때의 땔나무와 기름 값으로 더하였다. ○《약전안》에 자세히 보인다.
이 조에서는 혜민서 약전(藥田)의 위치와 수세(收稅)에 대해 설명한다. 종약전(種藥田)은 원래 약재를 종식(種植)하여 해당 관청에서 소용(所用)할 용도의 토지였고, 혜민서뿐 아니라 전의감(《실록》중종 39년 11월 1일 기사 참조), 내의원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내의원의 종약전은 생지황, 형개 등의 약재를 기르며 두 명의 관원을 파견하였는데, (《승정원일기》현종 2년 1월 18일 기사 참조) 그 관원들의 명칭은 종약관(種藥官)으로 내의(內醫) 중에서 교대로 6월과 12월에 교체하여 임명했다. (《내의원식례》 〈약전〉 참조). 현재의 서울 중구 약고개(藥峴)의 지명은 내의원의 약전(藥田)에서 유래했으며(《승정원일기》上同), 내국(內局)의 약전은 숙종(肅宗), 영조(英祖) 때에는 밤섬(栗島)에도 있었다.(《승정원일기》 숙종 34년, 2월 25일. 영조 6년 1월 9일, 기사 참조). 이밖에 규장각 소장의 《내의원식례(內醫院式例)》 〈약전(藥田)〉에도 내의원(內醫院) 약전 관련 기록이 있다. 영조 기사년(1749)에 약전고개에는 1결(結) 89부(負) 7속(束)이, 밤섬에는 10결 8속이 있었고, 영조 을유년(1765)에는 약전고개와 밤섬의 약전이 본래보다 줄어든 대신 여우도(汝于島)에 추가로 3결(結) 73부(負)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의 약전은 내의원의 약전과는 다르게 원래의 목적이 아니라 대전(代田)하여 세를 받는 식(두 관청의 약전은 조세 징수 대상이 아니었다)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두 기관의 약전이 혁파되게 되는 주요한 이유로 보인다. 강위빙의 서문에 《약전안(藥田案)》을 지칭하면서 《대약전안(代藥田案)》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당시의 현실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다. 전의감의 약전은 조선 중기 이후로 관련 기록이 없어 일찍이 혁파된 것으로 보이며 혜민서의 약전도 본문에 따르면 영조(英祖) 말년까지 해서 모두 팔아 없어졌다. ↩︎
동소문(東小門):한양 8대문의 하나로 동북쪽 문의 속칭이다. 처음에는 홍화문으로 부르다 중종 때에 혜화문으로 개칭하여 불렀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다. ↩︎
사아리(沙阿里):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
《공폐(貢弊)》 〈혜민서고지기(惠民署庫直)〉에 혜화문(동소문) 밖의 약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모래와 돌로 된 척박한 땅인데 초재(草材)를 심어 고지기로 하여금 여러 상사에게 책응하게 하였다. ↩︎
상서(尙書) 이복원(李福源):이복원(李福源, 1719-179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로 판서 철보(喆輔)의 장남이다. 정조 때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판사공파 19세이다. ↩︎
《승정원일기》 영조 45년(1769) 11월 11일 기사. 이복원이 혜민서제조가 되었다. ↩︎
건덕방(建德坊):한양 동부 12방의 하나이다. 현재의 종로구 원남동, 인의동, 연건동, 연지동, 효제동 일부와 충신동에 해당한다. ↩︎
홍문입동(紅門立洞):홍문선골. ↩︎
부원면(富原面):부원이 한성부로 편입되면서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으로 되었는데 용산방이 현재의 용산구, 서강방이 현재의 마포구이다. ↩︎
구수철리(舊水鐵里):현재의 서울 마포구 구수동 일원이다. ↩︎
장자전(塲字田):《천자문(千字文)》에 수록된 글자 차례의 순서대로 지번의 순서를 표시하여 붙인 이름이다. 예를 들어 ‘천자전, 지자전’ 식으로 순서대로 붙인다. ↩︎
부:결부파속법에 따라 산출량에 의해 정해지는 면적 단위이다. 10파(把)=1속(束), 10속=1부(負), 100부=1결(結). 조선시대에는 양전(量田)을 시행해서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6개의 등급을 나누었는데, 가장 척박한 6등의 전(田)은 1등에 비해 4배 정도 넓었다. ↩︎
신수철리(新水鐵里):현재의 서울 마포구 신수동 일원이다. ↩︎
무래공(無來貢):공물로 바쳐지지 않음을 뜻한다. 본문 〈공물〉에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