什物 | 집물1
印信 乾隆癸未, 改造.
인신(印信) 건륭 계미년(1763)에 다시 만들었다.
國忌板一,
국기판(國忌板)2 하나,
衙門題額一,
관청의 제액3 하나,
揭板一 乾隆庚寅秋, 英廟朝, 永禧殿行幸時, 歷臨本署, 當宁以春宮陪焉, 實無前盛擧也. 時提調 韓尙書 光會, 記以揭之.
게판 하나 건륭 경인년(1770) 가을, 영조 조, 영희전4 행행(行幸)5 때6 본서에 역림7하셨는데 지금 주상전하께서 춘궁으로 배행(陪行)하셨으니 실로 전에 없는 성대한 일이었다. 당시 제조인 상서(尙書) 한광회(韓光會)8 9가 기록하여 게시하였다.
《銅人經》上下卷 板子七十三立,
《동인수혈침구도경》 상하권의 책판 73닙,
《纂圖》四卷 板子一百二十七立 並在官庫.
《찬도방론맥결집성》 4권의 책판 127닙 모두 관고에 있다.
이 조에서는 혜민서에 소속된 집기를 설명한다. ↩︎
국기판(國忌板):임금과 왕비의 기일 등 국기(國忌)에 관련된 사항들을 적어서 걸어놓은 판이다. ↩︎
제액:글씨나 그림을 써서 둔 액자이다. ↩︎
영희전:한성부 남부 훈도방에 위치한 조선시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이다. 광해 11년(1619)에 태조, 세조의 어진을 모시면서 남별전 또는 봉자전이라 불렀는데, 인조 때에 원종(인조의 생부)의 어진도 함께 봉안하였다. 숙종 때, 전주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베끼어서 모시면서 영희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도 이후 모셔졌으며 그 때마다 건물이 중수되었다. ↩︎
행행(行幸):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함을 뜻한다. ↩︎
《승정원일기》 영조 46년(1770) 8월 10일 기사. 이날 영조(英祖)는 혜민서에서 전좌(殿座)하였다, 제조 한광회를 불러 혜민(惠民)이라 이름 하였으니 혜민할 수 있나 묻자, 제조는 과거에는 약(藥)으로 혜민하였지만 근래에는 그러지 못하다고 답한다. 영조가 각 관청에 올리는 약재 수에 관한 등록을 들여서 본 뒤, 제조와 계속 이어 문답을 한다. 혜민서관원과 생도 십여 인에게도 《소문(素問)》이 황제가 진실로 저술한 것인가 묻고 차례차례 답을 들어 보았다. ↩︎
역림:지나는 길에 들름을 뜻한다. ↩︎
상서(尙書) 한광회(韓光會):1715-179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문숙(文叔)으로 현감 사덕(師德)의 3남이다. 1738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영ㆍ정조 때에 형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공안공파 25세이다. ↩︎
《승정원일기》 영조 46년(1770) 6월 20일 기사. 한광회가 혜민서제조에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