官舍 | 관사1
署 在南部大平坊, 出《輿地勝覽》.
혜민서 남부(南部) 대평방(大平坊)에 위치한다. 출전 《여지승람(輿地勝覽)》.2
大廳 十間內, 南上房一間, 南夾抹樓房一間, 西退二間, 廳六間. 戌坐辰向. 創建未詳年紀.
대청 10칸인데 그 중에 남상방(南上房) 1칸, 남쪽 마루방(南夾抹樓房) 1칸, 서퇴(西退) 2칸, 청(廳) 6칸이 있다. 술좌진향(戌坐辰向)3 방향이다. 처음 세워진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庫 二間半.
창고 2칸 반이다.
抹樓房 二間內, 一間書員房, 一間庫子房, 附在大廳北.
마루방 2칸인데 그 중에 1칸은 서원방이고 1칸은 고지기방으로 대청 북쪽에 붙어있다.
前御廳 在大廳南, 廳四間半, 房一間半, 厨一間.
전함청 대청 남쪽에 있는데, 청 4칸 반, 방 1칸 반, 부엌 1칸이다.
符君祠 三間, 在大廳西北, 蓮池北.
부군사 3칸인데 대청 서북쪽에 있고 연지(蓮池)의 북쪽이다.
厠間 一間, 在大廳西南隅.
화장실 1칸인데 대청 서남쪽 모퉁이에 있다.
馬廐 一間, 在厠東, 今廢作空間.
마굿간 1칸으로 화장실 동쪽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빈 공간이다.
中門 一間, 在大廳東.
중문 1칸인데 대청 동쪽에 있다.
夾門 附在中門南 ○舊無夾門, 中間創丘, 以別參上參下官, 出入.
쪽문 중문 남쪽에 붙어있다. ○예전에는 쪽문이 없었는데 중간에 생겼으며, 참상관과 참하관을 구별하여 출입한다.
公事門 一間. 在大廳東南隅, 前啣廳東. ○康熙甲申, 趾齊閔尙書鎭厚提擧時, 捐出官參價四百兩及司圃署米九石, 修補,
공사문 1칸이다. 대청의 동남쪽 모서리, 전함청의 동쪽에 있다. ○강희 갑신년(1704), 상서(尙書)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4가 제거(제조)로 있을 때5에 관삼(官蔘)6 값 400냥 및 사포서7의 쌀 9섬을 덜어 내어 보수하였다,
大門 一間,
대문 1칸이다,
左右夾廊 二間. 在大門左右夾路傍. 今入閭家, 未詳年紀,
좌우협랑 2칸이다. 대문 좌우 좁은 길의 옆에 있다. 현재 여염집에 들어가 있는데,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典賣廳 舊例受銀戶曹, 貿易唐材, 以補萬民救療之需, 定廳官句管. 中間廢. ○廳三間, 房一間半. 在前啣廳南大路傍. 乾隆甲申, 公廨修葺時, 斥賣補用,
전매청 옛 규례에 호조에서 은을 받아 중국산 약재를 무역하여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한 수요를 보충하였는데, 청의 관리를 정해 사무를 맡아봤다. 중간에 없앴다. ○청은 3칸이고 방(房)은 1칸 반이다. 전함청 남쪽, 대로의 옆에 있었다. 건륭 갑신년(1764) 관청을 수리할 때, 싸게 팔아 수리 비용을 보태었다,
醫女廳 在大門內北. 瓦家三間ㆍ草家三間. 舊《志》, 貢人郭之堅入接云,
의녀청 대문 안 북쪽에 있다. 기와집이 3칸, 초가집이 3칸이다. 옛 《혜국지》8에는 공인 곽지견(郭之堅)이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惠民樓 在蓮池南ㆍ大路北. 古傳層樓屹立路傍, 壬辰亂後廢,
혜민루9 연지(蓮池)의 남쪽, 대로의 북쪽에 있었다. 옛날 전해 내려오는 말에는 층루가 길가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임진란 이후에 무너졌다고 한다,
池 在大廳西, 東西三間半ㆍ南北四間半,
연지 대청 서쪽에 있는데 동서로 3칸 반이고, 남북으로 4칸 반이다,
基址 古傳基址一千間, 迎華使時右山車, 來造於本署, 可想其廣闊, 而今存官舍所坐, 外空垈二百餘間, 而又閭家入接垈一百七十五間, 其餘累經兵燹, 無可憑考, 良可慨惜,
기지 옛날 전해 내려오는 말에 기지가 1000 칸인데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 귀한 산거(山車)10를 본서에 와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광활함을 상상해 볼 수 있으나 지금은 관사가 있던 자리만 남아 있고, 바깥 공터가 200여 칸에, 또 여염집이 들어와 붙어 있는 터가 175칸이고 나머지는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근거하여 상고할 수 없으니 참으로 슬프고 애석하도다,
혜민서 관청 건물에 대해 설명한 조문이다. ↩︎
《통문관지》를 보면 먼저 ‘본원(本院)’이라 하여 관청의 도성내 위치를 설명하고, 대청 같은 각 건물에 대해 기술한다. 혜민서는 《궁궐지(宮闕志)》를 보면 남부(南部) 태평방(太平坊)(현재의 중구 을지로2가)에 위치했다. ↩︎
(戌坐辰向):집터가 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
민진후(閔鎭厚):1659-1720.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지재(趾齋)로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장남이다. 168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삼방파 21세이다. ↩︎
《승정원일기》 숙종 29년(1703) 10월 13일 기사. 민진후가 제조가 되었다. ↩︎
관삼(官蔘):호조에서 관리한 인삼을 뜻한다. ↩︎
사포서:왕실 소속의 원포(圓圃)와 채소 재배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원포란 과일이나 채소 따위를 심는 밭을 말한다. ↩︎
《혜국지》:강위빙이 처음 저술한 《혜국지》를 말한다. ↩︎
혜민루:《승정원일기》 영조 46년(1770) 8월 11일 기사. 혜민서제조 한광회(韓光會)의 말에서 혜민루의 용도에 대해 추측이 가능하다. ‘古有惠民樓, 民有病, 來告者, 劑藥以給矣, 其法之不行, 久矣, 而其後貢價, 亦多減損矣.’ ↩︎
산거(山車):침향산(沈香山)이라고도 한다. 향약 궁중무를 출 때 쓰는 산 모양의 기구로 일종의 가설무대이다. 세종 때에 왕비가 온천에서 돌아올 때에 기생이 침향산을 설치해 맞이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침향산 자체는 무대 장치를 단순히 지칭하는 말이지만 (《실록》 세종 22년(1440) 4월 26일 기사 참조) 국가적인 사용례를 보면 종묘에 제례하거나, 친잠(親蠶)하고 나서 환궁할 때에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가 광해군(光海君)이 다시 복원하여 종묘에 제례하고 환궁할 때에 사용되곤 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예조(禮曹)의 청에 의해 네거리에서 불태워 없어졌고 이후 다시 단절되었다. 《실록》 인조 1년(1623) 3월 25일 기사. ↩︎
직방:조회 시간을 기다릴 때에 관아별로 기다리는 장소를 뜻한다. ↩︎
서린방:현재의 서울 종로구 서린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