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修惠局志》序 | 《중수혜국지》 서문
署舊無《志》, 雍正己亥, 姜公渭聘草創之, 乾隆丁卯, 不侫先父修飾之, 凡有事務, 賴以考据, 歲月旣久, 事例隨變, 勢宜有釐整之. 今提擧鄭參判以命不侫, 不侫乃與二三同僚, 蒐聚舊章, 參訂新式, 逐條增損, 必因原書, 竊附古人述而不作之義. 編旣成, 仍藏于署, 若其著《志》之規模節目, 已悉前序, 玆不贅焉.
혜민서에 《혜국지》가 오랫동안 없었는데, 옹정(雍正) 기해년(1719)에 강위빙(姜渭聘) 공이 처음 저술하였고 건륭(乾隆) 정묘년(1747)에 나의 선친(변석화)1께서 수정하셔서 모든 사무들이 이 책에 힘입어 상고하고 근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나 사례가 그에 따라 변하였기에 형세상 바로잡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제조인2 정 참판(鄭參判)3이 이 일을 나(변태항)에게 명하니, 내가 두세 동료들과 더불어 옛 제도를 모아 취합하고 새 규정을 참고하고 바로잡아 조목마다 더하고 덜되, 반드시 원서(原書, 혜국지 원본)에 근거하였으니 옛사람의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4는 뜻에 삼가 부친 것이었다. 책이 완성되자 혜민서에 보관하였는데, 《혜국지》를 지은 규범과 절목은 이미 앞의 서문에 모두 있으니 여기에는 덧붙이지 않는다.
歲在戊戌仲秋下澣, 久任密陽卞泰恒謹識.
무술년(1778) 중추(음력 8월) 하순에 구임 밀양인(密陽人) 변태항(卞泰恒)5은 삼가 쓴다.
선친(변석화):변석화(卞碩和, 1707-?)는 본관이 밀양(密陽), 자는 의백(義伯)으로 역과동지(譯科同知) 변삼원(卞三元)의 장남이다. 혜민서 교수를 지낸 의관이다. 경성파 20세이다. 박훈평, op.cit. p.214. ↩︎
지금 제조인:《승정원일기》 정조 1년(1777) 12월 28일 기사. 정창성이 혜민서제조에 임명되었다. ↩︎
정 참판(鄭參判):참판은 육조에 있는 종2품 벼슬이다. 당시 정창성은 예조참판이었다. 정창성(鄭昌聖, 1724-?)은 본관이 온양(溫陽), 자는 희천(希天)으로 지평 광은(光殷)의 장남이다. 175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감사, 대사헌을 지냈다. 북창공파 24세이다. ↩︎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논어》 〈술이〉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
변태항(卞泰恒):1730-1783. 본관은 밀양, 자는 사구(士久)로 혜민서교수 석화의 차남이다. 1754년 증광시 의과에 급제, 혜민서주부를 지낸 의관이다. 경성파 21세이다. 박훈평, op.cit. p.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