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海秀序 | 강해수 서문
嗚虖! 此卽我六代祖考贈參判公所著也. 公生於顯廟辛亥, 此《誌》之成在於肅廟己亥, 則公年時爲四十九, 而今距己亥, 爲一百五十有六年矣. 公之處官蒞事, 槪得於耆舊之記述, 而近見惠局所藏舊《誌》, 是乃公之撰定條約, 式爲一署之遵守, 豈不韙歟! 且其弁首文字, 雖不過當時記實, 文體古雅, 筆畵遒勁, 仍竊念片墨隻辭, 固不可湮沒無傳, 只因子孫之零替, 未能典守, 致此遺佚, 竟不知祖先儀型之萬一, 深庸愴惜, 何幸《署誌》之數百年不泯, 使不肖後孫, 得以知先祖規模之縝密ㆍ事功之悠遠者, 豈偶然也哉!
아! 이는 바로 나의 6대조인 증참판공(贈參判公, 강위빙)이 지으신 것이다. 공(公)은 현종(顯宗) 신해년(1671)에 태어나셨고 이 《혜국지》는 숙종(肅宗) 기해년(1719)에 완성되었으니, 공(公)의 나이 49세였고 지금은 기해년으로부터 156년이 흘렸다. 공이 관직에 나아가 일을 처리하신 것은 원로들의 기술에서 대략 얻어 알 수가 있는데 근자에 혜국(惠局) 소장의 옛 《혜국지》를 보니 이것은 바로 공이 조문을 찬정(撰定)하여 혜민서가 준수하도록 한 것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앞에 둔 글(서문)은 비록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데 불과하지만, 문체는 예스럽고 아담하며, 필체는 힘차고 굳세다. 이어 가만히 생각건대 한 조각 글자, 한 가닥 말조차 참으로 인몰(湮沒)되어 전하지 못하게 되서는 안 되건만, 자손이 보잘것없이 된 까닭으로 맡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유실되기까지 하여 마침내 선조의 의용(儀容)을 만에 하나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몹시 슬프고 애석하도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혜국지》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아, 불초한 후손이 얻어 선조의 치밀한 규모와 유구하게 전해온 공적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擎讀屢回, 宛若承誨聞命於當日膝下者然, 顧我雲仍, 孰不愛慕而瞻想也? 然又過幾十百年, 而舊蹟之愈久愈泯, 是懼是恐, 此所以蕉泉族父, 亟謄一本, 藏之于家者也. 小子旣敬先祖之遺蹟, 且感族父之至意, 敢識數語于後.
여러 회 받들어 읽으니, 흡사 완연히 당일에 슬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명을 듣는 듯하였다. 돌이켜볼 때 우리 먼 후손 가운데 누군들 애모하고 우러러보며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또 수십 수백 년이 흘러 옛 자취가 오래될수록 점점 더 없어질까, 이것이 두렵고 이것이 무섭도다. 이것이 초천(蕉泉)1족부(族父, 재당숙)가 이 책 1본을 급히 베끼어 집에 보관하게 된 까닭이다. 나는 선조의 남기신 자취를 경애해 온 데다 족부의 지극한 뜻에 감탄하였으므로, 감히 몇 마디 말을 뒤에 적는다.
歲同治甲戌端陽后二日, 後孫海秀敬志.
동치(同治) 갑술년(1874) 단양(端陽, 음력 5월 5일) 이틀 뒤에 후손 해수(海秀)2는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