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局志》序 | 《혜국지》 서문

夫惠局之設其來久矣. 粤自麗代逮于我朝, 置司設官, 掌醫藥之政令, 求民庶之疾苦, 實效《周禮》醫師之遺制也. 自壬丙以後, 官員之減省, 藥物之節損, 文簿之散逸, 條式之遺失, 大有乖於設立之本意, 不免有靡微之歎矣. 幸有我素軒趙尙書閤下提衡是署也, 飭敎訓而勸課醫學, 捐己捧而修葺官廨, 雖退處郊坰之外, 愈切憂憂之懷.

무릇 혜국(惠局, 혜민서)의 설립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멀리 고려 시대부터 우리 조선에 이르기까지1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의약의 정령(政令)을 관장하고 백성의 질고를 구제한 것은 실로 《주례》 의사(醫師)2에서 전해온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관원은 수를 줄이고, 약물은 비용을 아끼며 문서와 장부는 산일되고 법규와 제도는 유실되어 설립의 본뜻과 크게 어긋나서 무너지고 쇠퇴해버렸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였다. 다행히 우리 소헌(素軒) 조 상서(趙尙書)3 합하(閤下)4가 혜민서의 제조가 되어5 교육에 신경을 써서 의학을 권과(勸課)하며, 자신의 녹봉을 덜어 관청을 수리하였고, 비록 재야로 물러나면서도 근심하는 마음이 더욱 깊었다.

一日誨余曰: “一署規模散失無徵, 子可裒集諸條, 作爲一冊, 以爲永久遵行也.” 余稽首而退, 遂與療官金世顯等, 探討舊籍, 博採近聞, 繁者刪之, 漏者補之, 疑者質之, 紊者正之, 爰自《提擧》ㆍ《醫官先生案》ㆍ《騰錄》ㆍ《大仕冊》, 暨夫《前啣》ㆍ《生徒》ㆍ《官垈藥田》ㆍ《奴卑》ㆍ《救療功勞》ㆍ《赴京》之案, 無不釐整, 且撮其一署之最緊要者, 分爲二十五條, 名之曰《惠局志》. 於是乎本署之顚末, 醫政之綱領, 一開卷而瞭然於心目, 若非閤下用心之至, 何能及此耶!

하루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혜민서의 규범이 산실되어 징험할 바가 없으니, 그대가 모든 법규를 모아서 한 책으로 만들어 영구히 준행할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하셨다. 나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드리고 물러나 마침내 의관 김세현(金世顯)6 등과 더불어 옛 서적을 탐구 토론하고 근래 들은 것을 널리 채집하여 번잡한 부분은 없애고 탈루된 부분은 보충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은 묻고, 어지러운 부분은 바르게 한 바, 《제거(제조선생안)》7ㆍ《의관선생안》8ㆍ《등록(혜민서등록)》9ㆍ《대사책(大仕冊)》10으로부터 《전함》11ㆍ《생도》12ㆍ《관대약전(官代藥田)》13ㆍ《노비》14ㆍ《구료공로(공로책)》15ㆍ《부경(赴京)》16의 안(案)에 이르기까지 정리하지 않은 내용이 없었고 혜민서의 가장 긴요한 사항들을 뽑아 25조문17으로 나누고 《혜국지(惠局志)》라 명명하였다. 이에 비로소 본 혜민서의 전말과 의정(醫政)의 강령이 한 번 책을 펼치기만 하면 심목(心目)18에 명료하게 들어왔으니, 만일 합하(閤下)의 지극한 마음 씀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이에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噫! 有國而有民, 有民而有疾病, 有疾病然後有醫藥, 有醫藥然後可濟其扎瘥之患. 此正周之醫師, 宋元惠民局之所以設也. 蓋是署雖曰微司, 旣厠於百官之末ㆍ衣冠之列, 而且所主者, 是救活民庶, 則其責也, 顧不重歟? 然則蒞是任者, 誠能仰體國家設立之意ㆍ委任之責, 凡諸醫藥敎誨之方ㆍ權課之典, 靡不用極, 培養人材, 則發軔是司, 爲國手醫民命者, 將不知幾人, 而助益元氣, 導成春化, 俾一世蒼生, 咸躋于壽域之中, 其於聖上好生之德ㆍ澤民之治, 不無小補, 豈不猗歟休19哉!

아아! 나라가 있으면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질병이 있고, 질병이 있은 연후에야 의약이 있고, 의약이 있게 된 뒤에야 역병이나 질병으로 죽는 데서 구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의사(醫師) 제도와 송과 원나라의 혜민국(惠民局)이 설치된 까닭이다. 대개 이 혜민서가 비록 보잘것없는 관사라고는 하지만, 이미 백관(百官)의 끝과 관료의 반열에 끼어 있는 데다 주관하는 바는 백성을 구활(救活)하는 것이니, 그 책임이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그러한즉 이 직임을 맡는 자가 참으로 국가가 설립한 뜻과 위임한 책무를 우러러 헤아려서 무릇 모든 의약을 가르치는 방법과 권과(勸課)하는 법도에 대해 최선을 다하여 인재를 북돋고 기른다면, 이 혜민서를 처음 설립함에 국수(國手)20가 되어 백성의 목숨을 치료하는 자가 장차 몇 사람이나 될지는 알 수 없겠으나, 원기(元氣)를 도와 더해주고, 춘화(春化, 젊게 만듦)를 이끌어 이루어 한 세상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장수할 수 있게 한다면 성상(聖上)의 생명을 좋아하는 덕과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리는 다스림에 있어 자그마한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매우 아름답지 않겠는가!

余極知文辭拙陋, 而適忝任官, 辭不獲已, 何敢謂能也. 後之君子, 幸勿誚焉.

내 문장의 졸렬함을 잘 알고 있지만 마침 황송하게도 혜민서의 관직을 맡고 있어 사양에도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글재주가 있다 하겠는가. 후세의 군자들은 부디 꾸짖지 않기를 바란다.

歲舍己亥端月上澣, 久任晉山康渭聘謹識.

기해년(1719) 단월(음력 1월) 상한(상순)에 구임21 진산(진주)인 강위빙(康渭聘)22은 삼가 쓴다.


  1. 혜민국은 고려 예종 7년(1112)에 처음 설치되어 조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

  2. 《주례》 의사(醫師):《주례(周禮)》 〈천관총재(天官冢宰)〉 ‘醫師上士二人, 下士四人, 府二人, 史二人, 徒二十人.’ ↩︎

  3. 소헌(素軒) 조 상서(趙尙書):조태구(趙泰耉, 1660-1723)는 본관이 양주(楊州), 호는 소헌(素軒)으로 우의정 사석(師錫)의 차남이다. 16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경종 때에 영의정을 지냈다. 문강공파 14세이다. 조태구는 공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했으므로 ‘조상서’라 지칭했다. ↩︎

  4. 합하(閤下):정1품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로 삼정승이 이에 해당된다. ↩︎

  5. 혜민서의 제조가 되어:《승정원일기》 숙종 38년(1712) 5월 12일 기사. 조태구가 혜민서 제조에 임명되었다. ↩︎

  6. 김세현(金世顯):1678-?. 본관은 청양(靑陽), 자는 달포(達甫)로 만호 익찬(益燦)의 장남이다. 1699년 식년시 의과에 급제하고 혜민서 교수를 지낸 의관(醫官)이다. 감무공계 8세이다. ↩︎

  7. 《제거(제조선생안)》:제조선생안(提調先生案)은 혜민서 역대 제조의 이름과 재임 기간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혜민서의 구임소(久任所)에 필사본으로 한 부가 있었다. ↩︎

  8. 《의관선생안》:의관선생안은 임관선생안(任官先生案)과 녹관선생안(祿官先生案)으로 나누어서 현직의 의관을 기록한 책이다. 전자는 녹봉 없이 근무하는 무록관(無祿官)을 함께 기록한 것이며, 후자는 혜민서의 주부(主簿), 직장(直長) 등 녹관(祿官)만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혜민서의 구임소(久任所)에 임관선생안은 1부, 녹관선생안은 3부가 있었다. ↩︎

  9. 《등록(혜민서등록)》: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전함청(前啣廳)에 3부가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이 등록의 내용이 일부 인용 되어있다. 인용부는 주로 예조(禮曹)가 혜민서 관원의 인사와 관련하여 임금께 아뢰는 내용이다. ↩︎

  10. 《대사책(大仕冊)》: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구임소와 전함청에 각 한 부씩 있었다. ↩︎

  11. 《전함》:전함(前啣)은 전에 그 직임에 있던 사람을 지칭하며 前銜이라고도 한다. 본문의 서적 조를 보면 전함청에 1부가 있었다. 현재 전하지 않는다. ↩︎

  12. 《생도》: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전함청과 구임소에 각기 2부씩 있었다. ↩︎

  13. 《관대약전(官代藥田)》:〈약전안(藥田案)〉이라고도 한다. 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구임소에 1부가 있었다. 본문 지공(支供)의 〈약전〉을 통해 그 내용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다. ↩︎

  14. 《노비》:본문의 〈서적〉 부분을 보면 구임소에 1부가 있었다. 현재 전하지 않는다. ↩︎

  15. 《구료공로(공로책)》:본문의 〈서적〉에서는 전함청에 1부가 있었다고 하였다. ↩︎

  16. 《부경(赴京)》:부경(赴京)이란 원래 중국에 가는 사신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행원역으로 따라간 의원을 말한다. ↩︎

  17. 25조문:현존 본은 29조문으로 되어있다.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4조문이 늘어났다. ↩︎

  18. 심목(心目):사물을 알아보는 마음과 눈을 뜻한다. ↩︎

  19. 休:원문은 ‘体’로 되어 있는데, 문맥에 근거하여 ‘休’로 수정하였다. ↩︎

  20. 국수(國手):솜씨 좋은 의사를 뜻한다. ↩︎

  21. 구임:이 당시 혜민서에서 구임(久任)이라 하면 주부(主簿) 이상이며, 전의감에서 구임이라 하면 판관(判官) 이상인 자이다. 본문의 〈관제〉에 구임에 대해 나온다. ↩︎

  22. 강위빙(康渭聘):167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군망(君望)으로 사과(司果) 득건(得健)의 아들이다. 혜민서 의원으로 있다가 1722년 의약동참의가 되어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찰방(察訪)의 벼슬을 지냈다. 수운(守雲)계 4세이다. 아버지와 조부가 무과(武科)로 출사한 집안이었으나 강위빙 이후로는 조선후기 고종 조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들에서 의관(醫官)이 배출되게 된다. 박훈평, 《조선시대 의관총목록》(대전 : 한국한의학연구원, 2018). p.18. ↩︎